각권별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

분류 인명
에피파네스는 ‘신이 현현(顯顯)했다’는 의미로, 자신을 신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다.
출처 5권 재판 1쇄 374-380page
6권 초판 7쇄 279-280page

셀류쿠스 4세의 동생으로 그의 뒤를 이어 셀류쿠스 왕조의 왕이 되었다.
부친인 안티오쿠스 3세가 로마에게 패하였을 때 전쟁의 볼모로 로마에 끌려가 있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는 비천한 사람이었는데 셀류쿠스 4세의 장자로서 왕위에 오를 자였던 데메트리우스(Demetrius)를 자기 대신 로마에 볼모로 끌어들이는 간계를 부렸다. 또한 셀류쿠스 4세의 둘째 아들 안티오쿠스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기 부하 안드로니쿠스를 보내 그를 암살하였고 그 사살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안드로니쿠스까지 살해하였다. 셀류쿠스 4세를 죽인 헬리오도루스도 처단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다니엘 11:21下에 예언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프톨레미 6세와 세 번에 걸쳐 전쟁을 치렀다. 1차 전쟁은 단 11:22-24에, 2차 전쟁은 단 11:25-28에, 3차 전쟁은 단 11:29-30上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제 1차 애굽 원정(프톨레미 6세와의 제 2차 전쟁) 당시, 안티오쿠스 4세는 시리아로 귀환하는 길에 유다로부터 많은 재물과 보화를 탈취했다. 그는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성소에 들어가 황금 제단과 촛대를 파괴하였으며, 이 일 때문에 이스라엘 방방곡곡에 큰 슬픔이 넘쳤고 방백과 장로들은 탄식하였다(단 11:28, 마카비상 1:20-28).
제 2차 애굽 원정(프톨레미 6세와의 제 3차 전쟁)이 로마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자, 안티오쿠스 4세는 그 분풀이로 예루살렘에 대한 핍박을 더 강화하였다. 군대를 동원하여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혔고(단 11:31上) 주전 167년 성전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지했으며 12월 8일(기슬르월 15일)에는 성전의 제단에 제우스 신상(“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숭배하게 하였다(단 11:31, 마카비상 1:54, 마카비하 5:1, 6:2). 또한 그는 사신들을 예루살렘과 유다 여러 도시에 보내어 할례 예식과 안식일 규례를 금하는 등의 칙령을 공포하였다(마카비상 1:41-50). 심지어 율법을 지키는 자는 누구든지 사형에 처하였고, 왕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매월 25일마다 유다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를 잡아 제단에 바치도록 하였다(마카비상 1:54-64, 마카비하 6:7).
안티오쿠스 4세에 대하여, 다니엘 8장에서는 ‘네 뿔 중에 한 뿔에서 나오는 작은 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단 8:8-9). 이 작은 뿔이 영화로운 땅 예루살렘을 공격하고(단 8:9), 하늘 군대인 이스라엘 백성을 쳐서 지도자인 별들을 떨어뜨리고(단 8:10),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고 성소를 헐어 버린다고 말씀하고 있다(단 8:11). 이렇게 더럽혀진 성소가 정결하게 회복될 때까지 2,300 주야가 걸릴 것이라고 말씀하였는데(단 8:14), 실제 역사적으로 안티오쿠스 4세의 유다 종교 말살 정책이 시작된 주전 170년부터 마카비 혁명으로 성전이 회복된 주전 164년 12월(기슬르월 25일, 마카비상 4:52)까지 약 2,300 주야가 지나갔다. 이러한 안티오쿠스 4세의 행동은, 말세에 나타나서 하나님을 대적할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계 13:5-7).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모독한 죄로 내장이 썩어 들어가면서 시름시름 앓다가 너무도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그의 최후에 대한 예언은 단 8:25와 단 11:45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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