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4 23:01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성도의 성장에 대해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고, 성장기를 거쳐서 마지막에 결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히 11:6). 신앙이 성장하면 강하고 담대한 믿음이 됩니다. 사명에 충성할 수 있고 믿음으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한 믿음이 없으면 끝날에 무시무시한 환난을 만난 악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구약성경과 계시록의 일관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볼 때, 위대한 신앙가 아리마대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당시 국회의원으로 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무시무시한 환난 속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고,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역사적인 인물로만 보지 말고, 세상을 초월하고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진 그의 위대한 신앙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환난 시에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담대히 고백한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사이적을 베푸시고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대접받으실 때는 예수님의 제자라 할 만 합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고 묘지에 묻히는 순간에 “시체를 주시오”라고 담대히 요청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3년 동안 모시면서, 옥에도 죽는 데도 따라간다고 맹세했던 베드로도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고, 감히 십자가 곁에 와보지도 못했습니다. 조그만 계집아이의 말에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모든 가진 것을 다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당돌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줄 것을 요청하는 담대한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처음부터 강하고 담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9:38에서 그가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은휘’는 ‘사실을 숨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판, 끝장이 좋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국회에서 처리할 때 ‘그게 아니지’ 하면서, 부결표를 던졌습니다(눅 23:50-51). 이것만 봐도 예수님의 제자 되고도 남습니다. 그의 신앙이 남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강하고 담대하게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과 함께 환난을 감수할 수 있는 위대한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이 평상시에 하신 말씀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이 3일 만에 부활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뒷받침이 없었다면 빌라도 앞에 나가기는커녕, 세인들같이 비굴하게 도망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시체로 보지 않고, 시편 기자가 예언한 대로 믿었습니다. 오직 생명의 예수님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편 16:8-11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썩지 않고 부활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행 2:23-32, 13:32-37). 부활 후에 사람들의 증거를 듣고 믿는 신앙과 부활하기 전에 이미 부활을 믿는 신앙은 하늘땅 차이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귀하고 거룩한 성체인줄 알고 정한 세마포에 싸서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 분명히 예수님이 살아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마음이 세마포처럼 정하고 깨끗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리마대 요셉같이 천국을 확고하게 바라보고, 대세에 좌우되지 않고 말씀을 붙잡고 있을 때, 전 세계 인간들이 다 떨어진다 해도 마지막에 주님이 붙잡아주실 줄 믿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같이 끝장을 보고, 마지막때 그 나라 가서 큰상을 받는 산 역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마 24:13).
평강제일교회 원로목사 박윤식 목사의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