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료

5권 바벨론 포로 3차 귀환

2014.10.29 22:30

관리자 조회 수:77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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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제 1차 귀환 때 성전을 건축하게 하심으로써 유다 백성을 구속사의 주역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제 2차 귀환 때는 에스라 선지자의 개혁을 통하여 내면적인 신앙 회복을 이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제 3차 귀환 때는 성벽 재건을 통하여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차단하고, 개혁과 부흥 운동을 통하여 선민의 성결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제 3차 귀환은 느헤미야를 유다 땅의 총독으로 세워,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케 하고 유다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느 2:5-8, 5:14, 13:6). 제 1차 귀환과 제 2차 귀환은, 제 3차 귀환 때 이루어진 성벽 재건과 개혁 운동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으며, 유다는 다시 구속사를 이끌어 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시기
아닥사스다 왕 20년(주전 444년. 느 1:1, 2:1), 제 2차 귀환(주전 458년) 이후 14년째에 제 3차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던 느헤미야(느 1:11)가 형제 하나니를 통해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소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기슬르월(9월)이었고(느 1:1-3), 느헤미야가 왕에게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허락해 달라고 호소한 것은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니산월(1월)이었습니다(느 2:1). 시간 순서상 9월 다음에 10월~12월이 지나 다음해 1월이 오기 때문에 1월은 아닥사스다 왕 제 21년이 되어야 하지만 느헤미야서에서는 티쉬리(7월) 기준 달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월’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속사 자료 ‘통치 연대 계산에 필요한 이해 2’ 참조)


또 한 가지, 에스라 7:7에서 2차 귀환년도를 ‘아닥사스다 왕 7년’으로 표기해 2차 귀환년도가 마치 주전 457년인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느헤미야서가 티쉬리월 기준 달력을 쓰고 에스라서가 니산월 기준 달력을 쓰기 때문에 생긴 연도 차이입니다(느 1:1, 2:1, 학 1:15, 2:10, 스 4:24).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3차 귀환 시에 몇 명이 돌아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고, 느헤미야 한 사람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어 예루살렘에 보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느 2:5-8, 5:14). 아닥사스다 제 20년부터 32년까지 12년 동안 유다 총독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면서(느 2:1, 5:14, 13:6), 그들의 정착과 신앙개혁을 힘있게 이끌었습니다.


(2) 귀환 계기
당시 유다는 바사 제국에서 파견된 총독의 관할 지역에 속해 있었던 관계로, 성벽을 짓는다는 것은 곧 반란이나 폭동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오인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방백 르훔(사마리아 총독)과 서기관 심새를 중심한 강 서편의 아닥사스다의 신하들의 고소장을 받고(스 4:6-16) 예루살렘 성곽 공사를 중단시켰습니다(스 4:17-23). 이 때 대적들은 부분적으로 세워졌던 성벽을 무너뜨리고 분명히 불을 질렀을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20년 기슬르월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불타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느 1:1-3) 아닥사스다 20년 니산월까지 4개월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느 1:4-2:2). 마침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으로(느 2:8, 18),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벽을 중건하게 되었습니다. 성벽 재건을 심하게 방해했던 왕은 느헤미야의 간청을 듣고 귀환을 허락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도와주었습니다(느 2:3-8). 왕이 자기가 내렸던 조서를 번복해서 다시 조서를 내리는 일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3) 성벽 재건의 끊임없는 방해 공작
귀환한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끊이지 않는 대적들의 심각한 훼방과 위협으로, 성벽 공사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습니다.


① 내부 귀환자들 중의 방해 세력
담부(擔負. 등에 지고 어깨에 멤)치 않은 드고아 귀족들(느 3:5) - 드고아에 거주하던 유대인 귀족들은 성벽을 쌓는 데 있어서 무거운 짐을 나르지 않았습니다. 구속 사역의 가장 중대한 때에, 주의 일보다 자신들의 체면을 앞세운 것입니다.
예루살렘 근처에 있으면서 성벽 재건에 협조하지 않은 귀환자들(느 4:12) - 성벽 재건은 지역을 초월해서 이루어졌는데(느 3:2-18), 예루살렘 근처에 살면서도 자기 신변의 안전만 먼저 생각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② 대적들의 방해 공작 – 성벽 재건 초기
느헤미야가 치밀하게 성벽 전체를 42구역으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공사를 진행하자(느 3:1-32), 산발랏과 도비야 등의 대적들은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라며(느 4:3) 유다 민족을 조롱하고 노골적으로 방해했습니다(느 4:1-4).


③ 대적들의 방해 공작 – 성벽 공사 절반 진행
공사가 빠르게 진행되자(느 4:6), 대적들이 군사적 방법까지 동원하려 했습니다(느 4:8, 11). 큰 위기에 직면하자 유다 백성들은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느 4:10).


④ 느헤미야의 빈틈없는 작전(성벽 건축과 병행한 철통 수비태세)
대적들의 위협이 더욱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다가오자 느헤미야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신속하게 실행에 옮겼습니다.


건축 공사와 함께 전쟁 무기 준비를 병행(느 4:16-17)
전쟁 시 신호와 군사 집결을 위해 나팔 부는 자가 느헤미야 곁에 섬(느 4:18-21)
각 사람이 공사하는 동안 그 종자(노비)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자도록 함(느 4:22)
느헤미야와 그 곁에서 파수하는 자들은 잘 때도 옷을 벗지 않고 병기를 손에 잡음(느 4:23)


⑤ 대적들의 막판 방해 공작(느헤미야를 살해하려는 음모)
성벽 공사가 마무리되어가자 대적들은 급기야 느헤미야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느 6:2). 산발랏 제사장 스마야를 매수하여 거짓 예언을 통해 느헤미야를 해치려 하였으나, 느헤미야가 요동치 않으므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스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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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벽 재건의 기적적인 완성과 낙성식
① 6(엘룰)월 25일,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의 완성(느 6:15)
성벽 재건 공사는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주전 444년) 아브월(5월) 4일에 시작하여, 모든 방해와 음모를 이겨 내고 52일 만인 엘룰월(6월) 25일에 전격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느 6:15). 성벽 완성은 유다인들이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국가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② 에스라를 통한 율법책 낭독과 초막절 준수
성벽을 완성한 유다인들은 에스라를 청하여 율법을 듣고 온 백성이 눈물로 회개하였으며(느 8:1-12), 초막절을 규례대로 성대하게 지키고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느 8:13-18).


③ 언약에 인침
7월 24일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였고, 인을 쳐서 언약을 갱신하였습니다(느 9:1-38).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이방인과 같은 신세였던 이스라엘은 성이 중건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④ 성벽 낙성식
엘룰월(6월) 25일에 공사는 마쳤지만 낙성식은 예루살렘 거민이 너무 적었던 탓에 낙성식은 계속 연기되었는데,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거주지를 재배치하는 현명한 정책으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안에 거주하게 됨으로(느 11:1-24) 비로소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느 12:27-43). 느헤미야는 감사 찬송하는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한 떼는 에스라가 인도하고 다른 한 떼는 느헤미야가 인도하면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하여 성벽 위를 걷는 독특한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느 12:27-43). 낙성식이 거행되었던 날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신 23;3-6) 이스라엘 가운데서 섞인 이방인을 분리하여 언약 공동체를 새롭게 하였습니다(느 13:1-3).


(5) 느헤미야의 재귀환과 개혁
느헤미야가 12년의 총독 임기(주전 444-433년)를 끝내고 바사로 돌아간 후에, 유다인들이 다시 타락하자 1년 만에(주전 432년) 돌아와 개혁 정책을 실시하게 됩니다(느 12:4-31).


느헤미야는 성전 안에 거주하던 도비야를 추방하고 (느 13:4-9), 자신의 직무를 포기하고 떠난 레위인들을 복직시켰습니다(느 13:10-13). 그리고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게 하고(느 13:22), 이방 여자와 혼인한 사람들을 책망하고 쫓아내었습니다(느 13:23-28).


이러한 느헤미야의 개혁은 말라기 선지자와 함께 성경에 나오는 마지막 개혁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스라엘의 가슴에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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